며칠 전 저녁, 고등학생 딸이 평소처럼 식탁에 앉아 밥을 먹다가 조심스럽게 말했습니다.
“엄마, 마늘이랑 사과 좀 미리 사두자. 요즘은 그런 거 많이 먹어두는 게 좋대.”
건강에 관심이 생긴 건가 싶어 웃으며 “왜?” 하고 물었더니, 딸은 휴대폰 화면을 보여주며 말했어요.
“이번 산불로 농작물도 피해를 많이 봤대. 강릉이랑 울진 쪽 마늘밭이랑 사과밭이 불에 타서 앞으로 가격이 많이 오를거래. 오늘 도매시장 뉴스에도 거래량 줄었다고 나왔어.”
그제야 멍하니 앉아 있던 저는 딸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졌습니다. 그냥 뉴스 속 이야기인 줄 알았던 산불 피해가, 이제는 우리 가족의 식탁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을 그제야 실감했거든요.
2025년 3월 산불, 뉴스가 아닌 현실이 되다
2025년 3월, 강원도 강릉과 경북 울진·영덕 등 동해안 일대에서 대형 산불이 발생했습니다. 수천 헥타르의 산림이 불에 타고, 주택 수백 채가 소실됐습니다. 뉴스를 통해 보던 장면은 너무나 충격적이었지만, 솔직히 말해 저는 그저 ‘안타깝다’는 마음으로만 지나쳤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딸의 말처럼, 이 산불은 단지 산을 태운 게 아니라 ‘우리의 식탁’까지 흔들고 있었습니다. 강릉은 감자의 대표 생산지 고, 경북 일대는 마늘과 사과의 주산지입니다. 도매시장에서 이들 품목의 거래량이 줄고, 산지 물류가 지연되면서 이미 일부 품목의 가격 변동이 감지되고 있다는 기사도 심심치 않게 보게 됐습니다.
장바구니 물가, 자연재해 앞에 무방비로 흔들리다
“산불이 가격에까지 영향을 줄 줄은 몰랐어요.”
마트에서 장을 보던 중, 옆에 계시던 한 아주머니가 저와 비슷한 얘기를 꺼냈습니다. 마늘 한 통 가격이 올라 있는 걸 보며 “이거 다 산불 때문이라는 얘기도 있던데…”라고요.
우리의 식탁에 올라오는 식재료는 당연한 듯 여기지만, 그 하나하나가 기후와 자연재해에 얼마나 민감한지를 다시 느끼게 됐습니다. 농작물은 결코 공장에서 찍어내는 제품이 아니라, 사람의 손과 자연의 영향을 고스란히 받는 생명이잖아요. 산불은 그 생명을 통째로 앗아간 재난입니다.
“미리 사두자”는 말 속, 딸의 따뜻한 감수성
딸은 단순히 가격 상승을 걱정하며 말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안에서 놀라운 감수성을 발견했습니다. 어쩌면 저보다 더 빠르게 현실을 받아들이고, 뉴스와 일상을 연결한 것이죠. 그 말 한마디 덕분에 저 역시 식탁과 장바구니, 그리고 산불이라는 키워드를 엮어 다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소비자입니다. 매일의 선택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선택이 단순히 “싼 가격”에 그치지 않고, “지금 이 시기에 내가 선택할 이유가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된다면, 그건 한 걸음 더 나아간 소비라고 생각합니다.
소비는 마음을 담을 수 있습니다
마트에서 마늘을 살 때, 출하지를 유심히 살펴보게 됩니다. 이전 같으면 “강원도”라는 표기에 별 생각이 없었겠지만, 지금은 “이 농산물이 무사히 도착했구나”라는 생각이 먼저 듭니다. 그렇게 하나하나의 소비가 누군가의 노력과 연결되고, 지역과 연결된다는 걸 깨닫게 된 거죠.
산불 피해 지역은 단지 복구를 넘어 다시 시작해야 하는 곳들입니다. 농민들은 언제 다시 뿌릴 수 있을지도, 다음 해 수확이 가능할지도 알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그들을 도울 수 있는 방식은 많지만, 소비자 입장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지속적인 관심과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식탁 위에서 다시 세상을 바라보다
고등학생 딸의 한마디는 단순한 가정경제의 조언이 아니라, 저에게는 작은 깨달음이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먹고 사는지는 결국 우리가 어떤 세상과 연결되어 있는지를 말해주는 일입니다.
지금도 산불 피해 지역에선 복구 작업이 한창이고, 농민들은 땀 흘려 다시 일어설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식탁 위에서 조금만 더 그들의 상황을 떠올릴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함께 걷는 중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