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오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음식이 있습니다. 에어컨보다도, 선풍기보다도 먼저 생각나는 시원한 한 그릇. 바로 팥빙수입니다.
우유로 만든 얼음을 곱게 갈아낸 그 위에 고소한 단팥이 듬뿍 올라가고, 그 위에는 연유한 줄, 인절미, 떡, 때로는 아이스크림까지. 요즘 팥빙수는 단순한 여름 간식이 아닌, 여름의 정서를 대표하는 ‘계절의 디저트’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제게 팥빙수는 그저 유행하는 디저트가 아닙니다. 그 안엔 저의 어린 시절 기억과 가족의 이야기, 그리고 나도 모르게 달라져버린 입맛의 흔적까지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팥을 싫어하던 아이
어릴 적 우리 집엔 늘 떨어지지 않는 음식이 있었습니다. 바로 할아버지를 위한 팥죽과 콩장이었죠.
엄마는 할아버지를 위해 자주 팥죽을 끓이셨고, 팥죽을 만드는 날이면 삶아둔 팥으로 단팥죽도 함께 만들어 주셨습니다. 커다란 냄비에 팥을 푹 삶고, 그 중 일부는 설탕을 넣고 조려 달콤한 간식처럼 내어주셨죠.
하지만 그땐 그 단팥죽이 그리 반갑지 않았습니다. 삶은 팥에 설탕을 넣은 그 음식은 분명 단맛이 있었지만, 입안에 퍼지는 진한 단맛과 팥의 질감이 낯설게만 느껴졌습니다. 어린 제게는 그 조합이 왠지 어색했고, 한입 가득 퍼지는 팥의 풍미를 온전히 좋아하게 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팥빙수 역시 제 입맛엔 맞지 않았습니다. 친구들이 좋아하는 빙수를 저는 늘 다른 디저트로 대신했고, 카페에서 누군가 팥빙수를 시키면 고개를 저으며 말하곤 했습니다. “그걸 무슨 맛으로 먹어?”
어른이 된 지금, 다시 단팥을 이해하게 되다
시간은 참 묘합니다. 멀리했던 맛이 어느 순간 마음속으로 다가오는 날이 있습니다.
서른을 넘기고 마흔에 가까워질 무렵,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어느 여름날, 지인이 시킨 팥빙수를 한 숟갈 떠먹은 순간이 그랬습니다.
“어? 이거… 생각보다 괜찮네.”
자극적이지 않은 달콤함, 팥알 하나하나가 살아 있는 고슬고슬한 식감, 부드럽고 담백하게 갈린 우유 얼음이 입안에서 녹아가며 그 위에 얹힌 팥이 차분히 어우러지는 그 맛.
문득 엄마가 만들어주셨던 단팥죽이 떠올랐습니다. 그때는 싫다며 피했지만, 지금은 그 기억이 그리움으로 바뀌어 다가왔습니다.
그날 이후 여름이 되면 저는 자연스럽게 진짜 팥빙수를 찾는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보기 좋은 팥빙수보다, 정직한 맛이 담긴 수제 단팥빙수를 찾게 되었습니다.
부산 동래 ‘옛날 팥빙수’, 그 맛의 안식처
지금 제가 살고 있는 곳은 부산 동래구. 그리고 여름이면 어머니와 함께 꼭 들르는 단골 팥빙수집이 있습니다. 이름도 정감 있는 ‘옛날 팥빙수’.
이곳은 번화한 대로변도, SNS 핫플레이스도 아닙니다. 하지만 입소문만으로 꾸준히 찾는 손님들이 있는 진짜 맛집입니다.
빙수가 나오는 순간, 눈부터 반응합니다. 일반 물얼음이 아닌, 우유를 얼려 곱게 갈아낸 얼음 위에 푹 삶아 고소하게 조려낸 단팥이 아낌없이 올려져 있습니다.
떡, 인절미, 연유 같은 토핑은 최소한으로만 올립니다. 오히려 단팥 본연의 맛이 중심이 되도록 설계된 빙수입니다.
우유 얼음의 부드러운 질감과 고소함은 단팥과 만나 입안에서 스르르 녹아내리며 먹는 순간마다 조용한 감동을 전해줍니다.
한 숟갈 퍼 올려 입에 넣는 순간, 차갑지만 부담스럽지 않은 우유 얼음이 먼저 녹고, 그 뒤를 따라 단팥의 고소함과 은은한 단맛이 감돌며 기억 속 그리운 시간들이 조용히 되살아납니다.
“아, 이 맛이었지.” 어릴 적엔 이해할 수 없었던 맛이 지금은 여름을 기다리게 만드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팥은 나에게 '시간'이자 '성장'이다
팥은 제게 단순한 재료가 아닙니다. 어릴 적 엄마의 부엌, 할아버지의 식탁, 그리고 나의 성장과 회상을 연결해 주는 ‘시간의 맛’입니다.
싫어하던 음식이 시간이 흐르며 그리움으로 변하고, 이제는 먼저 찾는 맛이 되는 경험. 그 중심에 팥빙수가 있습니다.
누군가 “팥빙수는 그냥 시원한 여름 간식 아니야?”라고 말한다면 저는 이렇게 대답할 것 같습니다.
“팥빙수는 단순한 빙수가 아니에요. 그 안엔 시간도, 정성도, 추억도 함께 녹아 있거든요.”
이 여름, 진짜 팥빙수를 만나고 싶다면
요즘 팥빙수는 점점 더 화려해지고 있습니다. 푸딩, 젤리, 과일, 시럽이 넘쳐나는 비주얼 속에서 정작 단팥의 본래 맛은 점점 잊혀져 가고 있습니다.
그럴수록 저는 더 간결하고 정직한 맛을 찾게 됩니다. 그리고 그 맛을 만날 수 있는 곳이 바로 부산 동래의 옛날 팥빙수입니다.
이 여름, 당신도 누군가와 함께 차가운 얼음과 따뜻한 기억이 공존하는 그릇을 마주하고 싶다면 한 번쯤 들러보시길 바랍니다.
그 한 그릇 안에는 단순한 더위 해소가 아닌, 사계절을 관통하는 온기와 위로가 담겨 있을지도 모릅니다.
📍 부산 동래구 ‘옛날 팥빙수’
진짜 단팥, 우유 얼음, 그리고 시간이 만들어낸 진심의 맛. 팥을 사랑하는 분이라면 꼭 한 번 경험해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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